올해 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또다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이제 거의 계절적 의례처럼 반복되는 이 재난은 삶의 터전뿐 아니라 죽음의 안식처까지 집어삼키며 무덤들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2025년 3월, 이와 비슷한 비극이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국의 산불은 규모 면에서는 캘리포니아보다 작을지 몰라도, 그 영향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가진 국가 중 하나인 한국에서는 인간의 주거지와 묘지가 산림과 밀접하게 인접해 있다. 한 지역에 산불이 발생하면, 도시와 묘지가 더 빠르게, 더 많이 위험에 노출된다. 의성과 양양의 산불은 이런 현실을 고통스럽게 보여주었다.

이중의 상실: 사라진 무덤이 남기는 정신적 공백

가뭄과 폭염, 강풍이 만들어낸 완벽한 재난의 조건 속에서 불길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숲과 집, 그리고 무덤까지 모두 사라진 잿빛 풍경만 남았다. 고인을 기억하는 마지막 물리적 증거가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순간,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혹은 자녀들의 무덤을 잃어 버린 사람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이중의 상실감에 빠진다.

"한 번의 장례식으로 충분하다"는 전통적 관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산불, 홍수, 지진이 무덤을 집어삼키면 고인을 기리는 물리적 지점이 사라진다. 여기서 ‘Sim Eternal Ceremony : 두번째 장례식'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미 치른 장례라 할지라도, 무덤이 소실된 상황에서는 고인의 흔적을 다시 복원하고 추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XR 기술이 여는 새로운 추모의 시대

내가 뉴욕에서 설립한 BigCdotWorks에서 디자인하고 한국의 파트너들과 개발하고 있는, XR 콘텐츠로 만드는 유골함과 추모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다. 이는 산불로 사라진 무덤으로 인해 우리에게 필요해진 새로운 추모 방식, 장례 의식, 그리고 매장을 넘어선 공동묘지의 혁신적 대안이다.

'No Stone Tombstone Cemetery Solutions'는 말 그대로 '묘비석 없이도' 묘지를 유지할 수 있는 공동묘지 솔루션이다. XR(확장현실) 기술을 활용해 고인의 사진, 영상, 음성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저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상의 추모 공간을 구축한다. 천재지변으로 묘지가 소실되더라도 "묘지는 사라져도 기억과 추모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가치를 실현한다. 뉴욕에서 그 다양한 방식의 공동 묘지 아이템들이 기획되고 디자인되고 있다.

한국적 맥락: 조상 숭배 문화와 디지털 전환의 교차점

특히 이 프로젝트는 의성, 태백, 삼척, 영덕 등 한국의 산불 위험이 높은 지역에서 절실하다. 한국은 산지가 많고 인구밀도가 높아, 산불이 발생하면 인근 묘역까지 빠르게 번지기 때문이다. 장례 문화 역시 매우 전통적인 한국에서는 조상의 무덤이 사라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더 큰 충격일 수 있다.

찾아가는 모빌리티와 XR의 만남

'SIM Eternal Funeral Ceremony'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빌리티를 활용한 '찾아가는 두 번째 장례식'을 디자인한다. 이 개념은 내가 뉴욕에서 현대자동차와 함께 진행했던 초기 암진단 및 만성질환 환자를 위한 모바일 클리닉 프로젝트의 실질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특수 개조된 차량이나 목적 기반 차량(PBV)이 피해 지역이나 유족들이 모인 곳을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를 구상했다. 이 이동식 추모 공간에서는 실시간으로 XR 기반 추모 공간에 접속할 수 있어, 물리적 현실과 디지털 기술이 융합된 하이브리드 추모 경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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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복구의 우선순위 재고: 삶 너머의 기억도 중요하다

대규모 재난이 발생하면 당연히 생존자의 삶을 재건하는 데 자원과 관심이 집중된다. 한국에서도 산불 피해 복구 과정에서 주택과 농경지 복구가 우선되다 보니 묘지 복원에는 충분한 예산을 배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이상은 현실 앞에서 무력해진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고인을 존중하는 장례 문화가 지속되려면 저비용·고효율의 창의적 대안이 필요하다. 내가 제안하는 디지털 유골함과 XR 추모 공간은 물리적 무덤 대신 누구나 접근 가능한 가상 공동묘지를 구축하고, 장례식을 '찾아가는 의식'으로 재설계함으로써 적은 비용으로도 의미 있는 추모 행사가 가능하게 한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과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조상 숭배와 제사 문화가 강한 사회에서, 무덤의 소실은 단순한 물리적 손실을 넘어 문화적, 정신적 단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XR 기술을 활용한 가상 추모 공간은 단순한 대체재가 아니라, 이런 문화적 연속성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도구가 된다.

기술이 만드는 새로운 공동체 연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접근법이 가져오는 커뮤니티 연대다. 산불 같은 재난 지역은 교통망이 파괴되거나 접근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수 모빌리티가 무덤이 사라진 가족들과 지인들을 직접 찾아감으로써 자연스러운 위로와 추모의 역할을 하게 된다. 현장에서 XR 기술로 사라진 묘지를 가상으로 재현하며 "두 번째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은 '죽음의 영역'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재건에 집중해야 하는 주민들의 부담을 최소화한다.

기후변화 시대의 추모 문화: 지속가능성의 관점

한국 기상청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한 고온·건조 현상과 강풍이 증가하면서 산불 위험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물리적 무덤만을 고집하는 것은 점점 더 현실성을 잃어간다. 그렇다고 고인과의 연결, 추억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내가 제안하는 XR 기반 유골함과 추모 프로젝트는 '묘지'의 개념 자체를 디지털화해 전 지구적 재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추모 문화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감성과 기술의 융합: 미래 추모 문화의 청사진

나는 죽음을 단순한 슬픔이나 공포가 아닌 미래 도시의 필수 요소로 인식하며, '고인을 어떻게 기리고 기억할 것인가'를 전통과 기술이 융합된 창의적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감성적 측면에서는 고인의 영상과 음성을 재생하며 유족이 함께 추억하는 시간을 제공하고, 기술적 측면에서는 XR과 클라우드 기반 시스템으로 '버추얼 공동묘지'를 구축한다.

결론: 두 번째 장례식,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의성, 울진, 양양의 산불은 물리적 무덤의 영속성이 더 이상 보장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고인을 기리는 일이 중요하다면, 해결책은 "장례를 어떻게 확장·재설계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디지털 기반 공동묘지와 이동형 모빌리티를 활용한 두 번째 장례식은 이 문제에 대한 창의적 해법이다. 재해로 흔적이 사라져도 고인의 삶과 유족의 기억을 미래로 이어주는 이 접근법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전통을 넘어 기후위기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장례와 추모의 패러다임'을 열어가는 것만이 재난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기억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의 산불 피해 지역에서 배운 교훈은 전 세계가 직면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소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미국과 한국, 두 국가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문화적 배경은 다르지만 기후위기 앞에서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한 과제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기억의 지속가능성이다. XR 콘텐츠로 만드는 유골함과 디지털 추모 공간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의식 중 하나인 장례와 추모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필수적 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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